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문단 편집) === 일본이 재앙을 피할 기회를 스스로 거부했다 === 이러한 논란과는 별개로 어떤 식으로든 일본 정부의 책임을 부정할 근거는 없다고 보는 측면에서는 일본은 핵을 맞지 않을 기회가 표면적으로만 보아도 최소 2번 이상 있었고, 히로시마에 핵이 떨어진 뒤에라도 발 빠르게 항복했으면 나가사키 핵 투하는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구 일본군은 상황 파악도 제대로 못하고 본토 결전과 같은 망상에 젖어 있었다. 우선 연합군은 핵무기의 실전 배치에 회의적이었다. 핵무기는 극비 계획이어서 연합군 장성이라 하더라도 그 실체를 모두가 알았던 것은 아니다. 심지어 [[맨해튼 계획]]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와중에도 계획의 주축이었던 [[영국]]은 시간과 자원의 부족으로 인해 중도 포기했다. 미국에서도 맨해튼 계획은 굉장히 회의적으로 보였는데, 맨해튼 계획은 ''''[[나치]]'''가 핵폭탄을 개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까고 보니 나치에게 핵폭탄 같은 건 없었고, 당시 과학자들에게 핵분열을 다루는 건 이론상으로는 가능하나 실제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던 데다, 미국의 최대 적이었던 나치가 원자폭탄 개발 전에 무너지면서 맨해튼 계획 역시 좌초 위기에 이른다. 게다가 이미 일본의 승기는 사라진 지 오래라서 이 때 일본이 전쟁을 그만 두고 항복했더라면 막대한 비용이 소모되는 핵무기 개발의 당위성도 '''당장에 사라진다.''' 미국은 승전국이지만 GDP의 40% 정도를 전쟁에 쏟아부으면서 경제 상황이 매우 나빠졌고, 옛날의 전쟁들과는 달리 패전국들이 잿더미가 되어 그들에게서 자원을 강탈하거나 전쟁 배상금을 받아낼 수도 없었으며, 자력으로 무너진 경제 복구에 전력을 다해야 했기에 당시에는 그저 공상과학 같은 핵무기에 매달릴 수가 없었다. 일본의 패색은 점차 짙어졌고, 1945년 3월 이후부터는 [[도쿄 대공습]]을 시작으로 일본 열도 전역이 불바다가 되었고 수십만 민간인이 잿더미가 되었다. 이미 일본에겐 승전은커녕 유리한 협상의 고지조차도 당연히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5년 6월 9일에 열린 어전회의에서 일본이 제안한 평화 조건은 당시 일본이 현실 감각을 완전히 상실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당시 일본의 상황으로는 천황제 유지만을 외치는 것도 한참 모자랄 판에 군의 완전한 해체 및 전범 재판을 하거나 전쟁 전 일본의 식민지, 즉 조선, 대만, 태평양 군도, 심지어 만주국을 포기하겠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일본이 전쟁 중에 점령한 영토들을 반환하겠다고 결정하기는 했지만 [[필리핀]]을 포함한 상당수의 점령지들이 연합군 손에 돌아왔다는걸 감안하면 씨알도 안 먹힐 궤변이었다.[* Frank, Richard B. (1999). Downfall: the End of the Imperial Japanese Empire. New York: Penguin.] 자력으로 전황을 타개하는 것도 불가능한 데다, 연합군의 많은 자원을 소모시키던 추축국의 리더인 [[독일]]마저 항복한지라 시간을 끌며 유리한 상황이 오기를 기대할 수도 없었다. 유럽에서는 독일이 [[노르망디 상륙작전|동서 양면]]에서 [[바그라티온 작전|신명나게 두들겨 맞고]] 있으니 이미 전쟁 전에 세웠던 절대국방권을 사수하며 독일의 승리에 편승한다는 계획도 박살난 지 오래였으며 오히려 독일 패망 이후 유럽 전선에 배치된 수많은 인력과 물자가 이젠 일본 열도 방면으로 집중될 것은 자명했다. 따라서 시간을 번다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무의미했으며 차라리 무리한 전쟁을 그만 두고 협상책을 찾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광기에 찬 군부는 여전히 전쟁을 지속했고, 전쟁은 이후로도 '''거의 1년 가까이 더 지속되었다.''' 만약 여기서 전쟁을 그만 두었더라면 '''더 이상의 도시 공습과 핵폭격, 그리고 [[쿠릴 열도]]의 상실은 없었을 것이다.''' 1945년 5월이 되면 일본 이외의 모든 추축국이 전부 항복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의 전장은 이젠 태평양 일대로 좁혀졌다. 선악을 떠나서 일본 제국이 눈치가 빨랐다면 나치 독일이 항복하게 될 때 그냥 같이 항복해서 나치에 묻어갈 수 있었다. 어차피 8월까지 대일 중립이었던 소련은 말할 것도 없고 미영 등 서방 연합국도 유럽 우선 원칙[* 미국과 영국은 1941년 12월 미국의 본격적인 참전 시점에 최대한 많은 자원을 일본이 아닌 독일 방향에 쓴다는 대원칙에 합의했다. 미국 입장에선 감정적으로는 [[진주만 공습]]을 일으킨 일본이 독일보다 더욱 싫었지만 산업 역량을 비롯한 국가의 전쟁 수행 능력에서 일본의 3배였고 국제 정치의 중심인 유럽을 석권하던 독일을 훨씬 위협적인 적으로 인지했다.]에 따라 [[나치 독일|가장 중점적으로 조지려는 대상]]은 이미 정해져 있었으므로 일본은 [[이탈리아]]와 같이 나치 독일 등 뒤에 숨어서 비교적 묻어갈 수 있었다.[* 물론 [[진주만 공습]]을 일으킨 데다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일본 제국]]도 여러 가혹한 [[전쟁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아예 없었던 일처럼 묻어가기란 불가능했다. 단지 그럼에도 전쟁의 파급력과 역학적 중요성이 압도적이었던 독일에 비해서는 가볍게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은 맞고 실제로 전후 처리 역시 그러했다.] 그런데 일본 제국은 이 좋은 기회를 날려버렸다. 이 좋은 기회만 잡았더라면 '''핵폭격은 면할 수 있었다.''' 두 번째로, 일본이 전쟁 수행 의지를 보이자 연합군은 [[포츠담 선언]]을 발표한다. 연합군은 식민지 포기, 무장 해제, 전범 처벌만을 조건으로 제시했다. 이후의 경제 제재도 논의에 없었고, 재무장 제한에 대한 이야기도 전혀 없었다. 이는 독일에 제시한 항복 조건에 비하면 엄청나게 너그러운 조건이었다. 그러나 이런 파격적인 조건 제시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여전히 항복하지 않았고, 스즈키 간타로 총리는 아예 '선언을 묵살한다'며 애매한 표현과 함께 '우리는 전쟁을 지속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할 뿐이다.'라며 항복을 공개적으로 거부했다. 연합군은 이 선언에서 일본이 항복하지 않으면 일본의 파멸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명확히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항복하지 않았다. 만약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였다면 '''역시 핵폭격은 없었다.''' [[포츠담 선언]]과 독일의 항복 조건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비교해보면 알겠지만 포츠담 선언은 이미 항복한 독일에 비해 향후 일본에 대한 처벌이 상당히 너그러울 것임을 암시했는데 이에는 당시 정치적 상황을 비롯한 복합적인 원인이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전후 독일이 입은 피해에 비하면 일본의 피해는 새발의 피였는데 전후 양국의 처우 차이는 다음과 같다. * 고위 수뇌부가 모두 체포된 나치 독일과 달리, [[쇼와 덴노]]는 [[천황]]의 지위를 유지했고 근연 친족들도 황족의 자리를 보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 황족은 자연스레 전범재판에서도 기소되지 않았다.[* 단, 방계 황족의 경우 기소되지는 않았지만 [[신적강하]]를 통해 일반인 신분으로 격하되었다.] * 이후 베를린 패전 선언(Berlin Declaration)에서 '''독일은 일단 존재하지 않는 것(not exist)으로 간주되었다.'''[* 물론 지자체나 각종 부처는 실질적으로 독일인들이 맡았으나 이는 미영불소소의 감독 하였다.] 그러나 포츠담 선언에서 일본은 항복 이후에도 여전히 국가 지위를 유지할 것임을 명시했다. 실제 1949년 동서독 정부가 분리독립하기 전까지 4년간 국체 자체가 지도상에서 지워진 독일과 달리 일본은 1945~1952년의 7년간 미국 GHQ(군정청)의 지배 하에서 자체적으로 내각을 구성해 정부 기능을 제한적으로나마 수행할 수 있었다. * 독일은 미영불소 4개국에 분할 점령되었고 결국 국토가 동서로 분단되어 각기 다른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향후 40여 년간 분단 시절을 겪어야 했다. 반면 일본은 국토 분단을 겪지 않고 하나의 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다. * 일본은 가라후토([[남사할린]])과 치시마 열도([[쿠릴 열도]])를 제외하고 영토에 대한 손실 없이 식민지, 괴뢰국 및 점령지를 포기하는 조건에 불과했으나,[* 심지어 가라후토조차 1905년 [[러일전쟁]]의 전리품으로 뺏은 식민지였고 종전 직전인 1943년에 가서야 본토와 같은 내지에 편성되었기 때문에 일본이 실질적으로 뺏긴 본토(내지)는 고작 치시마 열도 정도이다. 게다가 치시마조차도 17세기 이후에야 일본인이 진출한 지역이다.] 독일의 경우 본토의 1/4이 주변국에 할양되는 조건이었다.[* 다만 독일의 경우 1차 대전 이후 식민지가 없었음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 이들 지역은 독일 입장에서도 중요성이 적지 않은데 일례로 [[동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는 독일의 고도(古都)로서 독일인들에게 남다른 향수가 있는 도시였으며, [[슐레지엔]]의 경우 [[루르 공업 지대]] 다음으로 산업이 발달하여 독일 경제에서 중요한 지역이었다. 물론 독일 역시 서부 지역에 비해서는 낙후한 동부 지역을 잃었다고는 하나 인구, 면적, 역사, 경제 무엇으로 보나 독일이 상실한 동방 영토는 일본이 상실한 가라후토나 치시마 열도와 비교가 불가하다.[* 한편 독일의 서부 지역에서도 영토 손실이 아예 없지는 않았는데 네덜란드와 벨기에 등은 피해 보상이라는 명목 하에 국경 일부 지역을 뜯어갔으며 이는 미국의 압력 하에 일부를 제외하면 1950년대에 반환되었다. 한편 프랑스는 [[제1차 세계 대전]] 때부터 논란거리였던 [[자를란트|Saargebiet 지역]]을 [[자르 보호령|보호령]]으로 삼아 이 지역을 완전히 자국에 귀속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이는 실패했고, 1957년 서독에 반환되었다. 다만 이런 잣대로 보면 일본도 자르 보호령과 비슷한 처지였던 국토로 류큐 열도와 [[오가사와라 제도]]가 존재하며, 이들 지역 역시 전후 오랫동안 미군의 통치를 받았다. 류큐 열도 북단은 각각 1952년, 1953년에 이르게 일본에 복귀했으며 오가사와라 제도와 류큐 열도 남단은 1968년, 1972년에 각각 일본으로 반환되었다.] * 일본군은 무장해제 후 고향에 복귀할 수 있었다. 독일군은 영미에 항복해도 소련의 수배망에 올랐을 경우 '''소련군의 포로가 된 것으로 간주했다.'''[* 이런 일이 발생한 건 독일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이 소련이었기 때문이다. 흔히 나치의 만행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유대인]]을 떠올리지만, 600만 명 정도가 사망한 유대인에 비해 소련의 인명 피해는 군인만 1천만 명 전후, 민간인까지 포함하면 무려 2,000~2,700만에 육박했다. 이렇다 보니 영미 연합군은 [[베를린]] 점령 당시 일부러 군대를 멈추고 소련이 가장 먼저 입성하도록 배려해줄 정도였다. 오죽하면 '우리가 소련에 한 것의 1/10만 소련이 우리한테 해도 우린 다 죽는다'라는 독일인의 말이 있었다. 소련군은 독일군에 대해 엄청난 악감정을 갖고 있었기에 [[굴라그]]에 끌려가며 매우 고생할 각오를 해야 했다. 5월 8일 주코프가 서명한 이 항복 조건은 일부 독일군이 산발적인 저항을 계속하는 계기가 되었다. 주로 전쟁 말기 독일 본토 방어전에서 특히 동부전선의 독일군들이 해당되는 부분이었으나 서부전선의 경우에도 예를 들면 전쟁 초기 동부에 있다 서부로 전속되어 싸운 자들과 전쟁 중 [[아돌프 히틀러|히틀러]]에게 찍혀서 예편되어 전쟁 말기에 지방에서 은신했던 일부 장성, 원수들도 소련이 수배하는 인물이었다면 넘겨지곤 했다. 물론 소련군에게 인계된 독일군의 각급 포로의 숫자는 결코 적진 않았으나 모두가 넘겨진 건 아니었다. 소련에서 특별히 수배하는 인물이 아니거나, 연합군의 직권으로 서방의 포로가 되었을 땐 종전 후 1948년까지 석방될 수 있었다.][* 물론 일본 역시 독일이 소련과 동유럽에서 그러했듯 중국과 동남아에서 어마어마한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으며 특히 중화민국의 사상자는 최대 피해국 소련의 80% 이상에 달했다. 하지만 당시 [[중화민국]]의 국력은 현실적으로 소련에 미치지 못했고 독일 본토의 절반을 접수한 소련과 달리 중화민국은 여전히 중국 본토에서 전쟁을 치를 뿐 일본 본토에는 진입하지도 못했다. 게다가 2차 대전이 끝난 직후 바로 [[국공내전]]에 접어든 터라 국민당도 공산당도 패전국 일본의 전후 문제 처리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어서 이를 미국에 맡겼다.] * 일본은 항복 후 산업 복구를 위한 무역에 참가할 수 있음을 명시했으나, 독일은 이런 수혜 조건이 없었다. * 독일 군대를 연합군의 평화 유지 목적을 위해 사역에 동원할 수 있었다. 말이 좋아서 평화유지 목적이지 실제로는 문서에 명시되었듯 '지뢰 제거 등'의 매우 힘들고 위험한 업무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일본군은 단지 무장해제 후 고향에 복귀하는 것뿐이었다. * 독일 민간인에 대한 처분도 애매하게 표시되었다. 독일의 민간 기구는 연합군 명령에 의하여 얼마든지 소환될 수 있었으며, 독일 시민은 연합군의 지시에 불응할 경우 '적절한 조치'가 취해질 수 있었는데, 이는 사실상 독일의 민간인이 연합군에 의해 사법처리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반면 일본 민간인들에 대해서는 이러한 처우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히로시마에 핵폭탄이 떨어졌을 때도 군부는 [[1억 총옥쇄]] 같은 망상에 빠져서 전국민 옥쇄 같은 허무맹랑한 소리나 하고 있었다. 이 때라도 항복했다면 '''최소한 나가사키 핵 투하는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결과는 2차 핵폭격이었다. 결국 일본은 추가적인 핵 폭격을 피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 기회를 스스로 거부한 것이다. 굳이 변명하자면 핵 무기가 기존에 존재했던 무기들을 월등히 뛰어넘는 기술적, 정치적 위력의 것이었기 때문에, 당시 일본 정부가 그에 따른 파급력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맞다. 그럼에도 당시 일본이 전세가 기운 전쟁을 무리하게 고집하면서 공습이나 가미카제 특공으로 인한 자국민의 무의미한 개죽음을 강요했고, 결국 핵이라는 더 크고 참혹한 피해를 막을 기회를 스스로 외면했다는 본질에는 변함이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